●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원인, 그리고 진실을 찾는 여행
518민주화운동의 실제 역사적 현장을 보고 싶어 며칠 전 광주역사여행을 다녀왔습니다.당시 상황을 광주시민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는 시민들이 모여 외치던 옛 전남도청 앞 민주광장입니다.'민주열사 오월길' 코스를 사전 예약하고 해설사와 함께 역사 여행을 시작했다.
가이드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만나자마자 볼펜과 투어코스 가이드를 건네주면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해설가한테 물어봤어요.518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에 계셨습니까.네, 저는 20대 공무원으로 현장에 있었어요."
역사의 산 증인과 함께 가는 길은 남달랐습니다.광장에 있는 민주의 종각은 1월 1일, 3월 1일, 5월 18일, 8월 15일처럼 1년에 4번 울린다고 합니다.해설자를 따라 518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980년 당시 '모든 것을 지켜낸 이 시계탑은 그 진실을 알고 있다'라는 기사가 발간되자 전두환 신군부는 한밤중에 시계탑을 몰래 옮겨 2015년 시민들에 의해 복원되었습니다5.18의 흔적을 간직한 역사적 공간은 이러한 사적비가 세워져서 그 내용을 자세히 담고 있습니다.구도청 광장 중심에 있는 이 분수대는 당시의 모습이 거의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곳이래요분수대 위에 서서 독재 타도,민주화를 외쳤고,시민들은 횃불을 들었습니다.구 전남도청 본관입니다.원래 가로로 쭉 뻗어나가는 하나의 건물이었지만 문화광장 공사로 가운데는 헐리고 뼈대만 남은 상태였습니다.옛 전남도청 회의실은 바로 옆 건물인데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해요.내부는 코로나의 여파로 개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볼 수 없었습니다.민원실로 사용된 이곳 는 유형 문화재 제6호, 일제 시대에 광주에서 활동한 건축가 김순 강(김·슨하)가 설계하고 시대에 앞선 조형 구상에서 근대 건축의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맞은편에 있는 상무관은 체육관이었는데 5 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자들의 시신을 임시 안치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시신이 입관된 채 태극기로 덮여 있는 모습의 사진으로 많이 보셨을 겁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원인5·18 민주화운동의 원인과 참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역사적 배경이 전제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폭동이라고 폄훼하는 인간들은 오로지 무기를 든 것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유신헌법 등을 통해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습니다하지만 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부산과 마산에서는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부마항쟁이 격렬하게 일어났습니다.1979년 10월 26일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박정희는 사망하고 군부독재정권이 끝나는가 하면 이미 득세하고 있던 전두환 군부가 혼란을 틈타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다시 군대, 군부가 등장하니 이를 새로운 군부세력인 신군부라고 부릅니다.대학생들은 계엄 해제와 유 신잔당의 퇴진을 촉구하기 위해 1980년 5월 14일부터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모여 신군부를 상대로 계엄 철폐와 민주화 요구 시위를 벌였다.
국민의 뜻이 전달되었다고 판단해 17일부터 정상 수업에 들어갔지만, 시위의 소강 상태를 이용해 5.17 비상 계엄 확대 조치를 선포합니다.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경계엄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모든 정치활동 중지, 집회 금지, 언론 장악, 대학교 휴교령, 파업 금지를 하게 됩니다.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광주는 이미 5월 17일 밤 10시경 7공수부대를 투입해 다음 날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의 등교를 막았습니다. 학생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철수는커녕 진압봉으로 학생들을 구타해서 연행했어요.
그것이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원인, 시작이었습니다.전남대 정문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려고 학생들이 시내 거리 시위를 벌이자 계엄군은 18일 오후 3시부터 시내에 투입돼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금남 거리로 몰려들자 무차별 곤봉을 두들겨 진압하고 터미널을 다녀온 김경철씨가 가장 먼저 죽습니다.
어릴 때 장애를 입어 귀가 어두워 계엄군 소리를 듣지 못했고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무차별적으로 맞았습니다.
시신검안서 내용 뒤통수가 갈라져 눈이 튀어나왔고 팔과 어깨, 엉덩이와 허벅지 등 온몸이 으스러진 타박상.18일 구타 후 병원에 옮겨져 19일 사망.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집 앞에 나섰다가 계엄군에게 저격당한 임신 8개월의 최미애 씨. 뱃속의 아이도 사망.어린 여학생의 옷을 찢거나 벗기고 하는 만행을 본 시민들은 시위대에 참여하면서 결사 항쟁 의지를 다졌습니다.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합니다.최근 공개된 영상에는 집단 발포 명령과 발포 부분이 빠져 있어서 편집자 여부를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수십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시민들도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계엄군 진압에 맞서 싸웠습니다계엄군은 광주 외곽 도로를 가로막고 차단하고 봉쇄한 뒤 인근 차량을 무차별 사격해 십여 명이 숨지고, 병력 간 오인사격으로 군인들이 희생되자 분풀이로 헤엄치던 학생에게 총격을 가해 정재수 군이 사망합니다.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고, 읍내 파출소 등을 쳐서 무장하기 시작했고 광주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혈전을 벌였습니다.시민들은 시민군을 위해 양은 대야에 주먹밥을 만들어 날랐고 전남대병원 등 의료진은 목숨을 걸고 시민들을 치료했습니다.5월 26일 계엄군이 전차를 동원해 진압작전을 예고하고 저녁 7시 시민군은 마지막 선택을 합니다.
항복이냐 죽음이냐! 27일 오전 4시 도청 주변의 총성과 수류탄 폭발음이 울렸고 기관총 소리가 계속됐다. 끝까지 구식 무기로 항전하던 시민군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진압은 끝났고,5.18 민주화운동은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그러나 이 민중항쟁은 민주화 운동의 발판으로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면서 신군부 세력은 6.29 선언으로 항복하게 됩니다.
5.18민주묘지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워 간 열사들에게 헌화와 참배를 했습니다김경철, 박기순 씨와 윤상원 열사의 묘비 뒤에는 가족의 사랑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글이 담겨 있습니다.얼마 전 문을 연 전일맥주 245에는 진실의 문이 있습니다.
논리적 증거도 없이 518민주화운동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적어놓았다.진실의 문은 반드시 열립니다.518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민중항쟁을 폭도로 비하하는 유튜버 광주 청년처럼 저도 아그로를 끌어들이기 위해서입니다.내용이 자극적일수록 유튜브의 수익은 올라갈 것이기 때문에...
518은 광주폭동이라고 알리려고 노력한다면 저도 518민주화운동이었다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5.18 폭동설이 가짜인 이유를 증거로 반박합니다.






































